인문계 대학원생의 나날

[인문학 박사생이란 것의 의미] 5. 학업편

청승이 2020. 6. 24. 19:54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학원생의 본분은 공부이다. 단,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중고등학교나 대학교, 혹은 각종 자격증이나 고시 공부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대학원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학생"보다는 연구자가 되기 위한 "훈련생"에 가깝다. 전공을 막론하고 현대의 학계에서 연구자란 지식의 생산자를 의미한다. 다시말해 대학원 과정은 지식의 소비자였던 한 사람을 지식의 생산자로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물론 학계를 굴리기 위한 행정 노동력으로 트레이닝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당연히 공부의 성격도 무척 달라진다. 막연히 학부과정의 공부가 재밌다는 이유로 대학원에 진학했다가 적성에 안맞는다는걸 깨닫는 경우도 많다. 오늘은 대학원생의 일상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공부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간략히 써보려 한다.

 

 

학과 수업

비싼 등록금을 냈으니 물론 수업을 들어야 한다. 국내 석사와 박사는 각기 2년의 코스워크(course work)로 이루어져 있다. 학교마다 다르지만 이 기간동안 대체로 석사 24학점, 박사 36학점 정도의 학점을 이수해야한다. 동대학원으로 박사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경우 보통 석사 과정에서 추가 학점을 이수하면 박사과정에서 인정받을 수도 있다.

세부적인 내용은 각 학교에 따라 다르지만, 예컨대 이런 식이다. 24학점이 요구되는 석사과정에서 30학점을 이수하면 6학점이 남는다. 박사입학 후 학점인정 신청을 하면 박사과정에서 들어야하는 36학점 중 6학점을 이미 수강한 것으로 친다. 남은 박사과정에서는 30학점만 수강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지도교수가 필요하다고 지정할 경우 학부에서 개설되는 전공과목을 추가로 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학부때는 한 학기에 27학점, 30학점도 듣는데 2년 동안 30학점이라니 별 거 아닌 거 같을 것이다. 실제로 과목에 따라 별로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허술한 교수는 어디나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대학원 수업이라는게 수업 한 과목 준비하려고 한 학기 내내 밤을 새야 할 수도 있다. 

아주 드물게 강의식 수업이 있긴 하지만, 인문학 전공 대학원 수업은 대체로 발제로 진행된다. 주로 (1) 텍스트 강독(번역 포함) (2) 선행 연구사 정리 (3) 개인 주제 발표(=소논문 발표)의 방식이 애용된다. 수업마다 보통 2-3인의 발제자가 주제에 맞는 발표문을 준비해오고-기본적으로 논문형식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PPT같은 건 거의 쓰이지 않는다-, 해당 발표에 대한 대학원생들의 질의 및 토론, 그리고 교수의 코멘트 순으로 이어진다.

철학텍스트나 사료, 문헌을 다루는 전공인 경우 텍스트 강독/번역의 비중이 크고, 연구주제가 현대에 가까울수록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개인 주제 발표의 비중이 크다. 어쨌든 인문학분야라면 어느 전공이나 텍스트분석->주제발표가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다. 이게 결국 논문작성과정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질의와 토론" 그리고 "코멘트"라는 표현을 썼지만 대부분 원생들은 난도질이라고 표현한다. 막 공부를 시작한 석사생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박사생들은 본인이 직접 발제를 하지 않을 때에도 박사생의 몫을 해야한다는 중압감이 심한 편이다. 학과마다 분위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내가 소속된 학과에서는 매학기 한명씩은 누가 수업시간에 울면서 뛰쳐나갔다는 말이 돌았다.

앞서도 말했지만 대학원은 훈련과정이라,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게 좋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내가 뭘 틀렸는지를 확인하고 수정하는 경험이 더 중요하다. 대학원에 오기 전에는 학계의 관습과 연구자에게 요구되는 관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걸 배우라고 대학원 과정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내가 너무 부족하고 아는 게 없다고 자책하거나 혹은 열심히 준비한 발제나 소논문이 예상보다 너무 혹평을 받았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자존심 상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런 과정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세미나

사실 대학원 과정에서 수업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자생적으로 돌아가는 세미나의 비중이 더 크기도 하고, 교수님이 주관하는 세미나의 경우 실질적으로 학점이 인정되지 않는 수업이나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세미나의 진행방식도 수업과 대동소이하지만, 혼자 읽기 힘든 자료나 텍스트를 보기 위한 목적으로 꾸려지는 경우가 많다. 원생들끼리 꾸리는 경우도 있고, 교수님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지도교수가 진행하는 세미나가 있을 경우 지도학생들은 필참이다. 세미나 결과물이 논문이나 번역서 등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세미나에서 공동작업으로 나온 결과물이 교수 단독저서로 출판되는 경우도 많다. 사실상 공장 

대학원에 전해지는 격언 가운데 하나는 절대 혼자 공부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학원 공부는 도화지에 지도를 그려나가는 것과 같다. 현재 발견된 땅이 어디까지이고 앞으로 탐구해야할 영역은 어디부터인지 확인해나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교과서나 참고서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혼자 이리저리 헤매면 3년 걸릴 과정을 좋은 동료들과 함께하면 6개월이면 축적할 수 있다. 서로 각자 그리고 있던 지도를 합쳐보면 내가 몰랐던 영역도 알 수 있고, 혹은 생각지 못했던 상이 들어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나보다 공부를 훨씬 잘 한다고 느껴지는 사람, 혹은 아이디어가 풍부해서 학적인 영감을 주는 사람의 세미나팀에 들어가는걸 추천한다. 공자님이 그러셨다. 나보다 못한 사람과 친구하지 말라고. 나보다 똑똑한 사람, 배울 점이 있는 사람과 공부해야 성장한다. 특히 석사생의 경우 석사생들끼리만 하는 것보다는 박사과정 이상의 선배를 꼭 포함해서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세미나를 통해 얻게되는 동료들도 무엇보다 소중한 자산이 된다. 단순히 친목이나 인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있는 것을 훨씬 편하게 생각하지만 공부하는 과정에서 느끼게되는 외로움은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단독연구가 주를 이루는 인문학 분야에서 내 연구방향이 틀리진 않았는지, 과연 읽어주는 사람은 있는지, 읽는다 해도 내 주장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에서 자유로운 연구자는 없다. 이때 내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조언해주고, 때로 채찍질해주며, 무엇보다 내 연구를 제대로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신진연구자의 앞에 펼쳐지는 학계의 무관심과 냉담함논문리젝에 좌절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든든한 동력이 되어준다. 

개인공부

그래도 어쨌든 개인공부 시간이 받쳐줘야 한다. 인문계 대학원생들은 랩실에 출퇴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노는 걸로 비춰지는 것 같기도 한데, 그건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져야한다는 의미이다. 랩실에 출근해서 실험돌리면 뭐가됐든 데이터라도 나오지, 인문학 전공자는 자기가 알아서 열심히 안하면 그냥 도태된다. 

인문학 연구는 대부분 개인 단독연구로 이루어진다. 본인이 진득이 자료와 씨름해서 결과물을 내야한다. 취업도 거의 안되는 마당에, 알아서 척척 성과를 쌓아올리지 못하면 비싼 수년치 등록금과 거기에 들어간 내 시간만 날리게 된다. 공부는 안 할 수록 할게 없어지고 할 수록 할게 많아지는 법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은 항상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고 느낀다.

내 경우를 예로 들자면, 박사수료 이후 순수 개인 공부 시간을 하루 8시간 정도로 유지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과정 중에는 수업도 많고 등록금도 벌어야 하다보니 개인공부시간을 그정도로 확보하긴 어려웠다- 프로젝트 근무, 학회 업무 등의 잡무에는 보통 하루 4-5시간이 고정적으로 들어간다. 결과적으로 하루에 평균 12-14시간은 책상에 붙어있는다. 주말은 주중에 밀린 공부를 하는 날로 삼는다.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이 워라밸이 균형잡힌 삶을 살고 있다거나 자신이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현재 공부량이 부족한 상태라는 의미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하루라도 공부를 하지 않고 휴일을 보내면 죄책감에 휩싸이곤 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성향과 인생에 대한 지향이 다르기도 하고, 갈수록 워라밸을 중시하는 경향이 커지다보니 함부로 공부는 하루에 얼마나 해야 한다느니 말하기는 어렵다. 공부에 대한 압박이 대학원생의 정신건강을 피폐하게 만드는 요인인 것도 사실이다. 나도 한때 편집증 비슷하게 누가 점심 먹으러 가자고만 해도 내 공부시간을 빼앗는 악당으로 보이던 시기가 있었다. 

모두 각자 자신에게 적합한 공부패턴이 있다는 전제 하에, 그래도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모든 분야가 그렇듯 이 분야도 미쳐야 미칠 수 있다. 인문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왔다는 것은 이미 안정적인 사회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교수로의 영전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이 길을 택한 내 목적은 훌륭한 연구성과를 남기는 것 자체밖에 없다. 불세출의 천재가 아닌 이상 다들 비슷한 능력치를 가진 동료들 사이에서, 비상한 연구성과를 내려면 비상한 노력을 하는 수밖에. 그리고 노력에는 시간이 들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공부 외의 다른 요소들은 희생시킬 수 밖에 없다. 

성실한 연구와 내 (정신)건강 사이에서, 나도 균형점을 계속 찾아가는 중이다. 원생들 간의 대화는 보통 이쯤에서 영양학적 균형의 필요성과 생존을 위한 운동 얘기로 넘어간다. 우리 모두 건강은 챙겨가며 공부를 하자는 뻘한 결론이 나왔지만 사실 대학원생의 학업생활에서 그게 가장 중요하긴 한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