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박사생이란 것의 의미] 4. 학과생활편
오늘은 대학원생의 학과생활에 대해 써보려 한다. 학부때도 그렇지만, 대학원생의 주요 인간관계는 같은 학과의 동료 대학원생들로 이루어진다. 대학원 선배, 후배와 동기들은 학위를 받고 학계에 계속 머무른다면 평생 교류할 사람들이기도 하다.
특별히 랩실에 매일 출근을 하지 않는 인문학 전공의 경우 각 학과의 분위기는 케바케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크게 몇 가지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학원 진학을 앞둔 경우 내가 가려는 학과가 어떤 유형인지 미리 알아두면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도움이 된다.
1. 개인주의형
같은 학과 같은 전공이라고 해서 함께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업이든 세미나든 개인적으로 알아서. 원생들끼리도 서로 알지 못하며, 회식이나 술자리 같은 건 당연히 없다. 원생들끼리 호칭은 석박 가리지 않고 '선생님'이 기본으로, 상호 경어체를 사용한다. 이런 분위기의 학과일 경우 교수님들부터가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경우가 많다. 심한 경우 교수가 지도학생의 이름을 다 모르는 경우도...
▶ 장점: 인간관계의 스트레스가 없다. 선배들의 꼰대질이나 간섭이 없다.
▶ 단점: 간섭이 없는 건 좋은데, 말그대로 각자도생이다. 대학원에 갓 입학했을때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장학금이나 조교는 어디서 구하는지 조언해주는 사람도 전혀 없어서 상당히 헤맬 수 있다. 대학원 공부는 수업보다 각자 전공지식을 심화시켜나가는 과정이 필요한데, 방법론적 노하우를 전해주는 선배가 없으면 처음 몇 년은 시행착오로 점철될 수도 있다. 또 대학원 공부의 7할이라고 할 수 있는 세미나가 학과 내에서 잘 돌아가지 않는다면 본인이 적극적으로 관심분야를 찾아다니며 공부하지 않는한 내가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며 대학원 생활을 허송세월로 보낼 수 있다.
몸과 마음은 편하지만 그만큼 스스로 부지런해지지 않으면 등록금만 낭비하게 될 수도 있다.
2. 공동체형
학과/전공 단위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는 경우. 세부전공이나 지도교수가 달라도 같은 학과/전공의 주기적인 모임이나 행사, 세미나가 활성화되어 있으며 친목이 활발하다. 원생들끼리 말을 놓는 경우가 많고 호칭은 언니오빠형누나를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선생님', '샘'도 통용된다. 공동체형 내에서도 유형이 갈리는데, 학과 규모가 커서 세부전공만으로 인원이 충분한 공동체가 형성되는 경우가 있고, 학과 규모가 작아서 전공 상관없이 어울리는 경우가 있다. 전자의 경우 학과 세미나가 활발하고 후자의 경우는 세미나가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국내 인문학 규모상 후자의 학과가 대부분이다.
▶ 장점: 신입생이 학과/전공 전체의 관심사라 입학하면 선배들이 돌아가며 밥을 사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정보를 많이 준다. 조교 자리를 선배들이 넘겨주거나 자동배정되기도 한다. 세미나가 활발히 운영되는 전공의 경우 전공지식이 심화되는 속도가 빠르고 선배들의 노하우도 배울 수 있다. 학계 관습에 금방 익숙해진다. 석사초기에는 수업/세미나의 발제문을 선배들이 미리 첨삭해주기도 한다.
▶ 단점: 한국형 가족적인 공동체의 모든 단점이 나타난다. 장점을 뒤집으면 모두 단점이다. 선배들의 간섭과 꼰대질이 심하고, 원치않는 회식이나 술자리가 잦으며 권위적인 분위기가 있다. 공사구분이 잘 되지 않아 밤늦은 시간이나 주말에 연락이 많이 올수도 있다. 무급으로 노동력이 동원되는 경우가 많고 하기 싫은 조교 등을 억지로 해야하기도 한다. 학계의 나쁜 관습에 물든다. 학과가 부조리로 가득찬 경우 온갖 악습과 인권침해가 만연할 수 있다.
대학원에 소속감이 생기고 선배들이 검증한 방식으로 스콜라십을 쌓아갈 수 있지만 학계의 악습을 고스란히 겪게된다. 단, 최근 몇 년 사이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많이 바뀌어서 (학과마다 다르지만) 꼰대질이나 술자리같은 건 상당부분 사라지기는 했다.
3. 갈라파고스형
공동체형의 심화 유형. 지도교수1인+지도학생으로 이루어진 연구실(랩실)만의 커뮤니티가 형성된 경우. 같은 전공계열 내의 타 연구실과도 교류가 없는 경우로, 학과내 해당 세부전공의 교수가 한 명일 때 종종 나타난다. 선후배의 세부전공이 모두 같기 때문에 그만큼 관계가 더 중요하고, 안좋은 방향으로 발현될 경우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공동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
▶장/단점: 공동체형X2배
이건 아니다 싶으면 도망쳐라. 물론 갈라파고스형이라도 좋은 연구실도 있다.
어디나 그렇듯 힘든건 일이 아니라 인간관계이다. 학과 분위기가 내 성향에 맞으면 즐거운 대학원생활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적응을 못하고 학업을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입학 전 해당 학과의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