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박사생이란 것의 의미 2 - 재정편
오늘은 대학원 생활의 가장 큰 부분, 경제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인문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면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전망은 어지간히 각오했을 것이다. 이제 직면하게 되는 또 하나의 현실적 문제는,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며 대학원을 다닐수 있는가이다. 물론 당신이 경제적 문제를 염려할 필요따위 없는 부러운 집안 출신이라면 이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인문학 대학원생의 경제생활
인문학 전공 기준 대학원 생활에 드는 비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연간 1,000만원에 달하는 등록금. 그리고 매달 드는 생활비. 자취를 한다면 주거비. 대학원생들은 이 비용들을 어떻게 충당하는가. 몇 가지 방법이 있다.
(1) 조교
대학원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싫어도 해야만하는 조교. 노동착취 직렬의 대명사이지만, 막상 돈이 궁한 원생들에게는 없어서 문제인 경우도 많다. 조교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크게 행정조교와 연구조교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행정조교는 학과사무실 및 단과대학, 기타 교내 기구에서 교직원과 유사하거나 동일한 업무를 하는 것이고, 연구조교는 학과 교수들 - 일반적으로는 지도교수 -의 개인 비서같은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시급제로 일하는 근로장학생 같은 조교나, 특정 수업만 보조하는 TA 등등 여러가지 근로형태가 존재한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조교에도 꿀보직과 헬보직이 있다. 물론 헬보직의 비율이 훨씬 높다. 행정조교의 경우 배정받은 사무실의 업무 강도가 같은 교내에서도 천차만별이고, 또 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교직원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합리적인 업무를 할 수도 있고, 교직원들의 일까지 떠맡을 수도 있다. 혹은 대학차원에서 인력을 줄이고 사람을 갈아넣는 정책을 취할 경우 업무의 하중을 고스란히 조교들이 지게 되는 경우도 생각보다 자주 생긴다. 대체로 업무 시간을 엄격하게 지켜야 하고 루틴 업무가 항상 있기 때문에 대학원생들이 좋아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말로 돈이 궁해서 찾아하는 게 행정조교일인 경우가 많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행정조교는 돈이 궁한 조교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연구조교는 상황이 조금 다를 수 있다. 정말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의미이다. 교수님이 시키면 해야지... 꿀보직과 헬보직이 극명하게 갈리는 직군이기도 하다. 이공계와 달리 특별히 랩실로 출퇴근을 할 필요가 없는 인문계의 경우, 교수님의 성향에 따라 연구조교 이름만 걸어놓고 출퇴근도 필요 없이 의례적인 서류 처리 업무 몇 가지만 하면 그만인 경우도 있고, 그 극단적인 반대에는 가끔 뉴스에 터지는 인분교수사건이나 팔만대장경 노예사건도 있다. 연구조교의 업무와 관리감독에 대한 모든 권한은 교수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교수의 인성에 문제가 있으면 헬게이트 열리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질나쁜 교수의 경우 조교자리(=돈)를 준다는 빌미로 협박하고 가스라이팅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연구조교가 될 경우 일반적으로는 정해진 시간에 교수님 연구실로 출근하여 자리를 지키면서 교수님의 각종 지시사항을 처리한다. 학부 수업 관리도 연구조교의 주 업무이다. 교수님과 매일 식사를 같이 하는 게 주요 업무가 되는 경우도 꽤 많다. 경험상으로는 사람 좋고 연구성과는 별로 없는 교수님의 연구조교가 꿀보직이고, 연구성과 많이 내는 분의 연구조교는 그 많은 일을 같이 해야 한다고 봐야 한다. (이런 분들은 애초에 일을 믿고 시킬 수 있는 똑똑한 원생을 조교로 발탁한다) 연구조교로는 교수님들이 말그대로 연구를 보조할 수 있는 박사과정생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국내 인문학 전공은 대부분 만성적인 원생 부족에 허덕이므로 석사생들이 연구조교를 하는 경우도 충분히 많다.
자 그래서, 이렇게 조교를 하고 얼마나 받느냐.
조교의 임금은 '장학금'으로 처리되는 학교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금액도 등록금의 100%, 70%, 50% 이런 식으로 정해진다. 문제는, 조교장학금으로 등록금의 100%를 커버해주는 학교가 생각보다 매우 적다. 내가 알기로는 서울시내에 2-3군데가 전부다. 그러니까 한 학기 내내 조교일을 해도 그걸로는 등록금도 다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사실 대부분이다. 업무가 많은 자리의 경우 최저시급도 안되는 경우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항의하기 어렵다. 이건 '임금'이 아니라 '장학금'이라서.
(2) 교내/외부 장학금
기대하지 마라.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에게 주는 장학금은 극히 드물다. 교내 장학금은 실질적으로 없다고 봐야 하고, 대표적인 교외 장학금을 운용하는 곳으로는 SK에서 운영하는 한국고등교육재단, 현대에서 운영하는 포니정재단, 나라에서 주는 글로벌박사펠로우십 등이 있기는 한데, 혜택이 좋은 만큼 받기가 쉽지는 않다. 막말로 심사위원과 학연이 있거나 서울대출신이 아니면 하늘의 별따기다 그외 전공별로 자잘한 장학금들이 있기는 한데, 충분한 양은 아니다.
(3) 프로젝트 연구보조원
내가 속한 학과에서 돌리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연구보조원으로 일할 수 있다. 이것도 하기 싫은데 억지로 동원되서 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고, 업무가 과다하거나 내부 갈등으로 괴로워지는 경우가 무척 많기는 하다. 그래도 대학원생이 전공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자리이고, 프로젝트 기한이 맞을 경우 그럭저럭 안정적인 생활비를 벌 수 있는데다 큰의미는 없더라도 경력 한 줄 쓸 수 있으니 할때는 시발시발 욕해도 지나고 나면 그거라도 있었어서 다행이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석사생은 월 80-100, 박사생은 월 120-150 가량을 받는다.
(4) BK 지원
BK라는 국가 지원 사업이 있다. 내가 속한 학과가 BK 사업단으로 선정되면 박사과정의 경우 8학기까지 월 100만원 가량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이번 연도부터 액수가 더 올랐다고 한다) 대신 장학금을 받으면 매학기 논문 한 편씩을 퍼블리시해야 한다는 꽤 빡센 조건이 있고, 여기서 탈락해서 8학기를 다 채워서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이것만 받아도 살 만 하고, 어쨌든 조건 맞춰 논문을 따박따박 게재하면 그만큼 본인 실적으로 쌓이는 것이니 나쁠 건 없다. 조교/프로젝트와 중복 수혜가 가능하다. 석사생에게는 별다른 혜택이 없다. 그리고 애초에 학과가 BK 사업단으로 선정되는 것 자체가 무척 힘들긴 하다.
(5) 아르바이트
이도저도 마땅치 않으면 아르바이트밖에 없다. 많은 원생이 과외 등으로 생활비를 번다. 나도 그랬고. 편의점 등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도 생각보다 꽤 있다. 그런데 대학원 공부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워서 아르바이트를 할 여력이 없는 경우도 무척 많고, 옛날 선비식 사고방식을 가진 교수님들의 경우 왜 공부할 시간에 딴짓하냐고 아르바이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며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아르바이트를 안하면 공부를 할 수가 없는데요ㅠㅠ
자립하여 대학원을 다녀야 하는 상황이라면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내가 스스로 벌어가면서 대학원을 다녀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느 정도의 고달픔은 감내해야 한다. 특히 석사 과정에 갓 진입했을 때는 학내 일자리에 대한 정보도 없고, 좋은 일자리가 드물어서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감당하기 쉽지는 않다.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다행히 집에서 통학을 할 수 있어서 주거비는 들지 않았고, 그 외에는 부모님께 지원을 받지 않았다. 대신 학자금대출+교통비가 딱 학교앞 월세방만큼 들기는 했다. 다행히 내가 다닌 대학은 조교 장학금으로 학비를 100% 커버해주는 곳이라 석박 과정의 등록금은 모두 조교로 해결했다.
등록금은 해결했어도 여전히 생활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석사과정 내내 주 4-6일 과외를 했다. 다행히 지도교수님이 매일 수업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 하러 간다는걸 나쁘게 보지 않는 분이었고, 석사 과정의 공부가 내게 그렇게 힘들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박사진학해서는 석사 과정에서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했어야 했다고 뼈저리게 후회하긴 했다-
박사 입학 이후에는 한층 수월해졌다. BK 장학금을 받아 생활비를 충당했고, 프로젝트팀에 연구보조원으로도 일하면서 박사수료 무렵부터는 과외 등 외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생활에 지장이 없어졌다.
이 정도까진 아니다. 한 달에 60만원은 벌 수 있다.
내 생각에, 본인이 집안에 돈을 보태야 한다거나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나 한 몸 챙기며 대학원에 자력으로 다니는 건 가능하다.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만 확실하다면 학비와 생활비는 몸을 더 움직이면 어찌저찌 해결할 수 있다. 정 어려우면 과정 중에는 한국장학재단에서 학자금+생활비 대출도 가능하다. 사는 게 순탄하지는 않지만, 못 할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만큼 내가 벌어먹을 자리가 없나 항상 빠릿하게 움직여야 하고 -필요하다면 석사 입학 전에 미리미리 학과에 나가서 조교자리가 없는지 탐색하자-, 학교 특성상 한 학기 단위로 일자리가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만큼 항상 불안정성 위에서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 표준적인 삶의 경로, 예컨대 20대 후반에는 얼마를 벌어서 결혼을 하고 저축은 이만큼 하고 그런 계획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대학원에서 30대 중반, 혹은 그 이후까지 장학금과 프로젝트 수당으로 먹고 산다는 건, '근로소득'으로 증명되는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 무게를 나는 대학원에 진학한 20대 중반에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