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박사생이란 것의 의미 1 - 진로편
나는 30대 중반, 국내 인문계 박사생이다. 유학이 필요없는 필드에서 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앞으로 인문계 대학원생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
인문학 석/박사의 진로
대학원 생활이라는 게 워낙 학교와 전공에 따라, 그리고 무엇보다 지도교수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대체로 인문계 대학원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취업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사기업/공기업체 취업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석사 과정 중이나 석사 학위 취득 직후에 공부를 포기하고 학계에서 탈출하는 것뿐이다.
전공을 살리는 진로는 학계에 남는 것 밖에 없다. 이공계나 일부 사회과학 전공처럼 각종 연구기관의 연구직으로 가는 길도 매우 좁다. 국가에서 1-3년 기한으로 따오는 프로젝트 팀에 잠시 소속되어 일하는 것 외에 정규직이나 무기 계약직 등으로 안정적으로 소속될 수 있는 유급 연구기관은 전공에 따라 전혀 없거나, 혹은 희귀하다. 그나마 인문계 전공에서 석사 학위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박사 진학 외에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인문계 박사학위자들은 무얼 하느냐. (1) 시간강사로 시급 3-8만원을 받고 일한다. (물론 강의시수는 천차만별이다) (2) 월 250-300만원의 봉급으로 각종 프로젝트 팀에 연구원으로 참여한다. 이 정도만 되도 한 숨 돌리는 셈이다. 문제는 프로젝트의 기간이 보통은 1-3년에 불과하고 - 드물지만 길게는 6년짜리까지 있기는 하다 -, 후속 프로젝트를 따오거나 다른 프로젝트에 디밀고 들어가지 못하면 그 이후는 각자도생이다. (3) 월수입 250만원 정도로 대학의 각종 유급 연구교수/강의전담교수로 일한다. 1년 단위 계약이 보통이다. 이 경우 자리에 따라 업무강도가 천차만별이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꿀 빨 수 있는 자리는 거의 없다. 대체로 연구교수라 하면 학과의 온갖 잡일이 주업무이다. '연구'가 업무가 되는 경우는...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연구전담교수라고 뽑아서 행정과 강의를 맡기는 경우는 있다. (4) 최근에 규모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데, 국가에서 년간 1000-4000만원 규모의 개인 연구 펀딩을 따온다. 역시 기한이 1-4년 정도에 한정되지만, 그야말로 연구성과 외에는 요구사항이 없어서 사업선정이 되면 한 숨 돌릴 수 있다. (5) 정년 트랙 교수가 된다. 모든 대학원생과 박사들의 목표로, 학계의 유일한 정규직 일자리이다. 그러나 인문학 전공 학과 자체가 사라지는 추세이고, 더구나 인구절벽의 시대라 내가 속한 전공의 경우 관련 학과가 일년에 1,2개씩 폐과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인문학 박사가 정년 트랙 교수가 될 가능성은 무척 희박하다.
하이퍼 리얼리즘
일반적으로 석박사 학위를 마치는데 빠르면 6년, 길면 십수년이 걸린다. 내 주위를 보면 평균적으로는 10년 정도인 것 같다. 나이로는 대개 30대 중반-40대 중반 정도. 다른 직종에서 10년 경력이라면 장인 취급일텐데, 우리는 10년 걸려 박사학위를 따면 그때부터 학계에 데뷔한 새내기 학자이다. 그렇다고 투자한만큼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도 않고, 정년트랙 교수가 되지 않는 한 대부분의 박사들은 1년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비정규직의 삶을 산다.
그러면 왜 이 길을 택하냐고?
셋 중 하나이다. 집안이 좋아서 돈 걱정 없이 정말 자아실현이 목표거나, 목구멍이 포도청이지만 연구가 너무 즐거워서 감수할 수 있거나, 혹은 이럴 줄 몰랐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었거나. 물론 마지막 경우가 가장 많다. 뭐 그래도, 학위 받고 버티면 학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찌저찌 입에 풀칠들은 하고 산다. 노후보장은 안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