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면)우울증 환자이다
30대 초반까지 우울증이란 나와 관계없는 단어인 줄 알았다. 나는 어떤 타입이냐면, 이른바 자존감이 높고, 세상의 기준은 크게 신경쓰지 않고(그런 줄 알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추구하며, 독립성이 강하다. 에너지가 넘치고, 바쁘고 정신없이 일하는 걸 좋아한다. 간혹 내가 매사 자신만만하다는 이유로 덮어놓고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울증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걸리는 병인줄 알았다. 십대 시절 주기적으로 우울한 시기가 왔지만 그럴때마다 바쁘게 무언가에 몰두하는 걸로 넘겨왔고, 스무살 이후로는 항상 바쁘게만 살아서 우울할 틈도 없는 줄 알았다. 항상 두통과 어깨통증에 시달렸지만, 자세가 나빠서려니 했다.
그러다 몇 년 전, 내 세계가 한 번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내가 무능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고, 그 경험 이후로 항상 심장이 가쁘게 뛰고 숨쉬기가 어려웠다. 짧은 시간 패닉이 오는 공황발작과는 다르다. 아무리 심호흡을 해보려 해도 들숨과 날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호흡기 문제인가 해서 내과를 찾아 폐활량 검사를 하고 약을 먹었다. 그러나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정신적인 문제라는 걸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인근 정신과를 찾았다. 신체적 증상은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요, 하고 말문을 열다 펑펑 울었다.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이야기를 듣더니 순간 충격이 컸던 것 같다며 약을 처방해주었다. 약을 먹으니 증세가 싹 사라졌다. 그렇게 몇 주간 약을 먹으니 심장 두근거림은 완전히 사라졌고, 호흡이 불편한 부분은 조금 남아있었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라서 그저 방치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새로운 스트레스 상황이 닥쳐왔다.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를 풀어야 했고, 나도 처음 겪는 일을 능숙한 듯이 해결해가야 했다. 힘들진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는 힘이 뻗쳤고 자신이 있었다. 수완도 있었다. 그런데 호흡이 어려웠다. 마치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느낌이 하루 종일 들었고, 결국 다시 병원을 찾았다.
지난번과 다른 병원이었다. 우울증 검사에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기관에서 심리 상담도 받아봤지만 검사상으로는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저는 괜찮은 거 같은데요, 라고 시작하는데 대뜸 눈물부터 나왔다. 의사는 그 이후로 몇 주간 이런저런 약을 번갈아 써 본 끝에 변형우울증이라는 진단명을 내놓았다. 이른바 가면우울증이다. 경증은 아니라고 했다.
처방받은 약을 먹으니 편두통과 어깨통증이 싹 사라졌다. 어깨통증이 정신적인 문제와 관련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고, 그래서 의사에게 말한 적도 없던더라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호흡곤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 1년 반 가량 더 약을 먹었다.
나는 내 감정을 마주보지 못한다. 감정을 들여다봐야 하는 순간이 오면 일로 도피했다. 그러면 괴롭지 않았고,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다. 감정을 다룰 줄 몰라서, 그것을 직시하려고 하면 대뜸 울음만 나오고 말은 나오지 않는다. 별 소득 없던 내 심리상담세션의 절반 이상은 그저 우는 것으로 채워졌다.
아직도 그렇다. 나는 해결법을 찾지 못했다. 작년 말 약을 끊었다. 원래 의사와 상의하고 천천히 끊어야 하지만, 먹던 약이 떨어진 후 병원을 찾지 않았다. 나아져서만은 아니었다. 가면우울증이 (아마도) 진짜 우울증으로 변해서였다. 가면우울증일 때는 이성적인 판단에 문제가 없었다. 증상이 있으니 병원에 간다. 그러나 작년 하반기에 나는 정말로 우울해졌고, 아침에 샤워를 하기가 버거워졌으며, 뜬금없이 살기 싫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툭툭 떠올랐다. 병원에 갈 만큼의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이상하게 대놓고 우울해지니까 호흡 곤란은 거의 사라졌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기운이 넘치지는 않지만 일상생활이 버겁진 않다. 호흡곤란은 스트레스 상황이 올 때 가끔 존재를 드러낸다. 어쩌면 난 경증조울증 환자였던건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데, 그 뒤로 병원에 가질 않아 진단받은 것은 아니다.
대학원에서 나는 무척 활동적인 사람이다. 우울증을 드러내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내 이미지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내 증상을 알게 되면 동료들이 언젠가 내 병 탓을 하게 될까도 두렵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 곳에다만, 내 마음의 어두움과 우울의 증상에 대해 털어놓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