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계 대학원생의 나날

대학내 위계형 성폭력에 대한 대응 전략 1

청승이 2020. 6. 24. 20:03

오늘은 원래 원생의 학과생활에 대하여 포스팅을 하려 했으나.. 요 며칠새 또 교수-대학원생 간의 위계형 성폭력 사건이 연달아 터지는 걸 보고 착잡해져서 주제를 바꿨다. 시대가 바뀌고 또 최근 몇 년간은 더더욱 분위기가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학내 성폭력은 흔한 일이다. 지난번에도 썼듯이 특히 대학원생의 경우 교수와의 관계에서 철저한 을의 입장이고(2020/06/24 - [인문계 대학원생의 나날] - [인문학 박사생이란 것의 의미] 3 - 지도교수편), 일반적인 회사생활과는 달리 아예 학계를 떠나지 않는 한 이직하듯 상황을 피할 수 없다보니 취약한 상황에 놓이게 되기 쉽다. 성폭력 피해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다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불행히도 이미 피해를 겪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지금 교수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 있다면

*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은 어떤 이유로도 피해자가 성폭력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피해자에게 왜 분명히 저항하지 못했는가 따위의 질문을 하는 것은 피해를 당한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전형적인 2차 가해 행위에 해당한다. 다만, 이 글은 피해자에게 "전략적으로" 유리한 선택이 무엇일지에 대한 필자의 고민과 경험에 바탕하고 있다. 원칙론보다는 실제 문제 해결 과정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포스팅의 내용 가운데 불편한 지점이 있다면, 댓글로 지적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성폭행/성추행을 당했다면 망설이지 말고 경찰에 신고하라.

학내 인권/성평등센터에도 신고하라. 성범죄로 유죄가 나오면 100% 파면이다. 심각한 수준의 성추행- 목격자가 있는 경우 -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사건이 조용히 해결되거나 단시간내 깔끔히 처리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교수가 대학원생을 성폭력을 저지른다면, 이건 개인간의 분쟁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교수 하나가 잘린다는 건 그 밑에 있는 대학원생들 전체가 소속을 잃게 되는 일이다. 교수가 성범죄로 고발되거나 학내 인권/성평등센터에 신고가 들어가면 일단 가장 먼저 내려지는 조치는 직위해제이다.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는다 해도, 교수가 성폭력 사건으로 직위해제를 당했다는 건 몇 시간이면 학내에 다 퍼진다. 피해자의 신원도 매우 높은 확률로 알려진다. 대부분은 가해자, 혹은 가해자의 동료가 적극적으로 떠들고 다닌다. 피해자의 행실이 어떻다느니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느니 하는 주장이 판을 치고, 가해자 쪽에서는 자신의 동료교수 혹은 다른 지도학생을 통해 피해자에게 화해와 합의를 강권한다. 

교수를 해고하기 위한 징계위 자체도 무척 오래걸린다. 대체로 빨라야 한 학기, 길어지면 몇 년이 걸린다. 특히 해당 사안에 대해 형사고소가 들어갈 경우, 형사재판의 판결이 나오기 전에는 징계가 내려지지 않는다. 1심에서 승소하더라도 가해자가 항고하면 2심 판결이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과정이 아무리 빨라도 2년 이상 걸린다. 그 동안 가해자가 수업과 주요 학과 업무에서는 배제되더라도 교내에 위치한 자신의 연구실에 출입하는 건 막을 수 없으며, 가해자가 어느 프로젝트의 연구책임자라면 그건 교내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정지되지 않는다. 교수가 대학원생에게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가해자 입장에서도 자신의 인생이 걸린 일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피해자를 협박/회유하여 사건을 무마하려 든다. 학과의 다른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이 피해자에게 오히려 적대적일 수도 있다.

대학원생이 교수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신고를 한다는 건, 학교를 그만두지 않는 한 이 모든 일을 고스란히 다 겪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경찰에든 교내 인권센터에든, 대학원생이 교수를 신고하는 순간 학과는 뒤집어지고 피해자의 일상은 파탄이 난다. 대부분 그것이 두려워 신고를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고하라고 권한다. 명확한 성폭력의 경우 피해 정도가 심한 만큼, 가해자에 대한 징계도 확실히 내려진다. 괴로운 시간들을 버텨내고 나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다. 두려워서 없었던 일처럼 참고 넘어가면, 속에서 더 곪아 터져 결국 나를 좀먹게 된다. 지도교수는 수십 년을 계속 봐야하는 사람이다. 아무 일 없던 듯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는 위계형 성폭력의 특성상 가해행위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될 수 있으며, 복수의 피해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아니, 아마 당신이 첫번째 피해자가 아닐 것이다. 

피해사실 신고 후 무엇을 해야할까

법적 절차를 밟는 것 외에, 학내 센터에 신고한 이후 취해야 할 행동은 다음과 같다:

  • (가해자가 지도교수인 경우) 지도교수 변경을 요구하라.
  • 가해자 접근 금지와 피해자 보호를 요청하라.
  • 학과내에서 나를 지지해 줄 교수를 만들어라.
  • 대학원생 가운데 나의 지지 세력을 만들어라.
  • 학과 외부 단체의 조력을 구하라.

절대로, 조용히 해결할 생각은 버려라. 앞서 말했듯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바란다한들 어차피 조용히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반대로 최대한 당당하고 시끄럽게 굴며 요구사항을 학과에 분명히 관철해야 가해교수를 확실히 축출하고 나를 보호할 수 있다.   

지도교수 변경과 가해자 접근 금지 등의 조치는 일단 인권/성평등센터에 요청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다 해결해줄 것이란 생각은 버려라. 국내에 인권센터가 제대로 돌아가는 대학 자체가 거의 없고, 그나마 가장 잘 운영이 된다는 곳도 결코 피해자의 눈높이에 차지는 않을 것이다. 센터가 아무리 처리를 잘 해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각 학과가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대학에서 센터의 영향력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공식적으로 센터에 요청하고 담당자를 자주 찾아가 진행상황을 확인하다보면 결국 나와 학과장, 관련 교수들의 미팅이 열리게 된다. 거기서 요구사항을 관철시켜야 한다. 

당연히, 내 편이 나 하나뿐이라면 교수들에게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약속을 받기 어렵다. 교수는 언제나 교수편이다. 따라서 학과내에서 나를 위해 다른 교수들을 설득하고 움직여줄 교수가 필요하다. 피해자에게 공감하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줄 교수가 누가 있는지 잘 생각해보고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라. 도움을 청하면 힘껏 도와줄 의식있는 교수님이 적어도 학과에 한 명은 있을 것이다. 있길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문제를 일으킨 교수와 적대 관계에 있는 교수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해라. 나의 조력자 교수가 학과장 정도 되면 상황이 훨씬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교수뿐만 아니라 대학원생들 가운데에서도 조력자가 필요하다. 함께 대책위를 꾸려 적극적으로 함께 행동해줄 사람들이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대부분의 원생들은 그렇게 전면에 나서는 일을 두려워한다. 그런 동료들이 있으면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피해자 지지집단을 형성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그들은 학내 2차가해를 차단하는데, 더 나아가 피해자가 속한 학계에서의 여론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물론 피해자가 계속해서 대학원생활을 해나가는 데에도 가장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힘이 된다.

다른 대학원생들, 특히 가해교수의 지도학생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이런 사건이 무마되기를 바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피해자의 동료라도 마찬가지이다. 가해 교수가 잘린다면 그들은 한순간에 지도교수를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교수가 얼마나 개차반이었든지 간에, 그가 해고되면 그 지도학생들은 학위논문 심사 절차가 멈춰지고, 전공분야가 다를 가능성이 높은 새로운 지도교수 밑으로 들어가서 처음부터 적응해야 하며, 혹은 해당 교수에게 헌신해온 수년간의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잘하면 피해자의 아군이 되지만, 잘못하면 2차 가해자가 될 가능성도 가장 높은 집단이기 때문에 문제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시키고 공감대를 형성해 최소한 피해자에게 적대적이거나 2차가해자가 되지는 않도록 설득하는 것이 좋다. 물론 피해자가 이런 일들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피해자 지지집단이 중요한 것이다. 소수라도 피해자 지지집단이 형성되면, 그들이 학과 내외에 퍼지는 악의적인 루머나 가해교수의 지도학생들에게서 나오는 불만을 방어해줄 수 있으며, 이는 사건 이후 피해자가 계속해서 연구자의 길을 가는데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학과 외부 단체의 도움을 구하는 방법이 있다.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할 만한 곳은 대학원학생회이다. 유감스럽게도 대학원학생회가 활발히 활동하는 학교가 많지는 않지만, 평소 학내 이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학생회가 있다면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다음으로는 각 학교의 여학생위원회 등 여성단체가 있다. 이런 단체들의 경우 학부 중심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소속 학교의 과거 교수 성폭력 사건에 주력으로 대응했던 단체, 혹은 활동가를 찾아서 상담해보는 것도 좋다. 그 외 도움을 요청할 만한 곳으로는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등이 있다. 이들 단체들에 도움을 요청하면 대부분 대책위가 꾸려지고 이들이 피해자를 대리하여 대외적인 활동을 하기도 한다. 언론 노출이 잘 이루어지는 것도 큰 장점이다. 보통 학교의 센터나 학과에서는 사건이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것을 싫어하며 그것이 오히려 징계위에서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 있다고 피해자를 압박하는 경우도 있는데, 형사처벌이 확실시되는 성범죄라면 징계위에서 가벼운 처분을 할 수 없을 뿐더러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경험상 사회적 공론화가 많이 이루어진 사건일수록 경과가 좋다. 그래야 학과 교수들도 피해자를 조심스럽게 대하기도 한다. 

이상이 교수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취할 수 있는 기본적인 대응전략이다. 교수와의 다툼은,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자가 학계에서 계속 살아가기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만약 도무지 용기가 안나고 두렵다면, 최소한 증거라도 확실히 남겨둬라. 물증이 있으면 가장 좋지만 -특히 CCTV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수 있으니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한다-, 피해사실을 지인에게 알린 카톡, 익명으로 피해사실을 고백한 SNS 모두 증거자료가 될 수 있다. 일기나 메모도 증거자료가 될 수 있다. 단, 피해사실은 최대한 구체적으로 적어놓는 것이 좋다. 나만 알아볼 수 있게 두루뭉술하거나 애매하게 써놓는 것은 큰 도움이 되기 어렵다.  

 

이상은 유죄 판결이 예상되는 성폭행/성추행 사건의 경우를 상정하고 쓴 내용이다. 그보다 강도가 낮은 성추행, 혹은 성희롱의 경우는 보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사실 가장 흔하고 악의적인 케이스들은 법망에 걸릴까말까한 낮은 강도의 성폭력을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교수들이다. 그런 경우 피해자의 수가 무척 많고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진다는 점도 큰 문제이다. 다행인 점은 2019년부터 성폭력 범죄로 벌금 100만원 이상을 선고받은 교원은 당연퇴직 사유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상습적인 성추행은 정도가 심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여기 해당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물론 유죄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자료 확보가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문제제기를 하는 시점을 잘 가늠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교수를 고발했다면 반드시 해고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자들이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글에서 다루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