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계 대학원생의 나날

[인문학 박사생이란 것의 의미] 3 - 지도교수편

대학원생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지도교수다. 지도교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학원생이 노예로 불리는 까닭, 잊을만하면 한번씩 언론에 터지는 대학원생에 대한 인권침해 뉴스의 8할은 지도교수가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이다. 지도교수를 그렇게 만든 학계의 구조가 나머지 2할이다.

본인은 정당방위를 주장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도교수는 원생의 보스이다.


대학원에서의 교수는, 특히 지도교수는 중고등학교의 선생님이나 학부수업의 교수님과같이 지식전달자(teacher)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영어로는 mentor 혹은 advisor 정도로 부른다. 지도교수는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대학원생을 한명의 학계 구성원인 연구자로 키우는 '트레이너'라고 할 수 있고, 원생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냥 나한테 일 시키는 사람이다.

뭐해 연어 안잡아오고


특히 이공계의 경우는 지도교수가 중소기업 대표, 원생들은 직원이라고 봐도 무방한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연구팀 규모로 굴러가지 않고 개인단독연구가 대부분인 인문학 전공의 경우 그렇지는 않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교수님의 경우 지도학생들이 일년에 한두번 지도교수 얼굴 보기도 어렵다고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원생의 과업은 대부분 지도교수가 할당해준 업무들로 채워진다. 먼저 가장 본연의 업무인 (학위)논문 지도가 있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경우 의미있는 논문지도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는게 원생들의 팽배한 불만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학위를 받을때가 되면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분량의 원고를 들고 주기적으로 지도교수를 찾아가 컨펌을 받아야 한다. 의욕적인 교수님들의 경우 과정 내내 정기 상담(원생들은 상담때마다 뭐가됐든 성과물을 들고가야한다는 압력에 시달린다)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래도 논문지도는 원생과 교수의 관계에서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문제는 다음 경우들에서 발생한다.

과다한 조교업무. 연구 조교는 물론 교수의 지명으로 이루어지고, 그 외에 상황에 따라 학과 행정 조교, 학과 소속 연구소나 관계 부처의 조교도 교수의 지명으로 충원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경우 지명된 원생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없다. 싫어도 찍소리 못하고 해야하는게 당연한 걸로 분위기가 형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업무와 대우가 합리적이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는가. 대부분 그렇지 못하고, 원생은 불만을 제기하지 못하는 입장이다. 회사라면 이직이라도 하지, 여기선 학업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잘 없다. 지도교수가 시켰는데 어쩌겠는가.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교수들의 경우 싫은 일을 억지로 시켜놓고 장학금 챙겨줬다며 생색을 내거나, 혹은 형편이 어려운 원생들을 타겟으로 조교 자리를 주겠다며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시키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 다음으로 원생들이 지도교수에 딸려가는 부속 노동력으로 취급받는 대표적인 상황은 학회이다. 학회는 대체로 대학원생+젊은 박사들의 노동력으로 굴러간다. 대체로 무급노동이다. 그중에서도 실무 허드렛일은 거의가 대학원생들 차지다. 교수가 어디 학회 이사 혹은 회장으로 취임한다 = 지도학생들은 모두 끌려가서 일한다. 마찬가지로 거절 같은 건 없다. 문제는 그렇게 떠맡는 학회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 학회일에 치여서 정작 자기 공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원생들이 가장 욕하는건 그런 무급노동을 교수들이 "일을 배우는 좋은 기회"라고 언급할 때다. 일을 배우긴 한다. 바로 그렇게 원생 갈아서 학계를 굴리는 방식을 말이다.

그 외에도 학과 일이나 교수의 연구보조(자료수집, 번역, 출판용 원고검수, 대필), 주말의 등산까지 지도교수의 캐릭터에 따라 원생에게 부여되는 과업의 리스트는 끝없이 늘어날 수 있다. 대부분 무급이고, 폭언, 모욕, 사생활침해, 성폭력 등 인권침해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대다수의 대학원생은 (지도교수가 시킨) 과다한 잡무로 인해 본인의 연구활동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지도교수는 평생 따라다닌다

지도교수는 나에게 학위를 준 사람이고, 박사학위논문은 내가 학계에 있는 동안 죽을때까지 내 대표 저서로 언급된다. 당연히 나에게 학위를 준 지도교수의 이름도 같이 언급된다. 

학계에서 통성명을 할 때에도 지도교수의 이름이 포함된다. 누가 누구 교수 밑에서 학위를 받았다는 건 그 사람의 연구 성격에 대한 주된 참고사항으로 일컬어진다. 

요즘은 학령인구가 감소하고 더구나 인문학 전공 학과들이 사라지는 판에 워낙 교수되기가 어려운지라, 지도교수가 어디 자리에 꽂아주고 그러는 일도 기대하기 어렵다. 인문계 한정으로 막상 내 커리어에 지도교수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주는 건 또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생부터 박사까지 뭐 하나 해보려면 지도교수의 추천서를 요구하는 경우도 많고, 학계가 평판과 인맥이라는 게 또 중요한 곳이다보니 지도교수와 사이가 껄끄러워지면 이래저래 활동반경이 좁아진다. 간혹 지도교수와 틀어진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면 참 짠하고 안쓰럽다. 지도교수가 앞길을 도와주진 못해도 훼방놓기는 참 쉬워서, 지도교수와 도저히 더이상 잘 지낼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대부분은 공부를 포기하고 학계를 떠난다. -간혹 악의가 있건 없건 본인 제자 욕하고 다니는 교수님들이 있는데 그런걸 보면 정말 화가 난다. 본인이 가볍게 던진 돌멩이에 원생 개구리들은 맞아 죽는다- 

지도교수를 바꾸는 일도 해당 교수들간의 상호 협의, 혹은 퇴직이나 사망 등의 유고가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아예 전공분야를 전혀 다르게 바꾸면 모를까. 석사 때 지도교수와 너무 안맞아서 박사를 다른 학교로 진학했더니 배신자라고 부르면서 수 년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사례도 봤다.

결국 학계에서 커리어를 계속 이어갈 생각이라면, 큰 덕은 못보더라도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지도교수의 의사를 거스르기는 어렵다.

셋째, 지도교수에 대한 상위 감독기관이 없다

원생은 지도교수에게 (그게 뭐가 됐든)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 어려운데, 외부적으로도 교수를 관리감독하는 기관이 없다.

대학은 일반 조직과는 다르다. 보직교수라는 지위가 있기는 하지만, 연구에 몰두하거나 워라밸을 중시하는 대부분의 교수들은 애초에 보직교수가 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일단 정교수가 되면 그 이상의 승진이라는 개념이 없고, 당연히 정교수를 관리감독할 상급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학문의 자율성이라는 가치가 곁들여지면, 교수 개개인과 그 제자들로 이루어진 연구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조직으로 여겨진다. 학과마다 분위기가 다르지만, 같은 전공이라도 타 연구실과 교류하지 않고 지도교수-지도학생끼리만 폐쇄적으로 굴러가는 경우도 많다. 폐쇄되고 위계화된 조직은 권력 오남용이 벌어지기 완벽한 환경이다. 물론 교수의 인품이 보통만 되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간혹 견디다 못한 -대부분 형사법으로 해결해야할 문제가 발생한 상황을 말한다- 대학원생이 학내 인권센터나 성평등센터에 신고하는 경우가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대학원생이 공부를 그만두거나, 교수를 학계에서 매장시키겠다는 모 아니면 도의 싸움이다. 고발을 시작한 경우, 교수에게 해임 이상의 징계를 내리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본인 연구실을 굴리는 교수들에게는 어차피 승진이 의미가 없다. 감봉? 정직 몇 개월? 그게 학계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월급이 깎이거나 몇 개월 강의를 쉴 뿐인 교수가 자신을 고발한 원생을 어떻게 대할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교수를 해고하는데 그리고 법의 철퇴를 내리는데 성공한다면 그나마 희망은 있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긴 싸움의 시작일 뿐이다. 학계는 그 교수의 동료들로 이루어져있으니까. 원생들이 대부분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건 이러한 까닭이다.

넷째, 겪어보기 전엔 알 수 없다

이처럼 모든 상황이 교수 인품 하나에 달려있다는 게 대학원의 문제이다. 문제는,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 교수가 원생들에게 어떤 사람인지 알 방도가 없다는 사실이다. 밖에서는 멀쩡하다.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입학과 동시에 지도교수를 정해야 한다면 나의 대학원 생활은 사실상 운명의 주사위 던지기에 맡겨져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유감스럽게도 그게 현실이다.

개인적으로는 학부 때 좋아하던 교수님의 지도학생이 되겠다는 석사생들을 보면 항상 우려스럽다. 존경하고 경애하던 마음은 기대와 엇나가면 실망으로 바뀌기 쉽다. 교수는 학부생들은 서비스구매자로 대하고 원생은 부하직원으로 대한다. 학부때 본 모습과 원생으로 보는 모습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도교수를 절대 섣불리 결정하지 마라. 상담 한 번 해보고 좋은 분이라고 판단하는 건 금물이다. 대학원 상담을 오는 학부생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교수는 없다. 가장 좋은 건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해당 학과 소속 원생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그럴만한 조언자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면... 운의 여신이 당신의 편이길 바랄 뿐이다.

지도교수를 정하기 전에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들
  • 유명한 교수가 꼭 좋은 교수는 아니다. 언론에 비친 모습이나 뛰어난 저술에 반해서 올 생각은 제발 하지 마라.
  • 해당 학과 대학원생의 말을 들어라. 직접 아는 사람이 없고 소개받을 사람이 없다면 온라인 익명상담으로라도 찾아봐라. 
  • 무턱대고 교수님께 면담요청을 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학부생들은 학과 교수님께 가벼운 마음으로 대학원에 가면 어떻겠냐고 여쭤보는 것 뿐이지만, 교수는 그걸 본인 지도학생으로 오겠다는 의미로 착각한다. A교수님께 상담하러 한 번(!) 갔다가 B교수를 지도교수로 삼는 경우 A교수는 최소한 질투, 최악의 경우에는 해코지를 할 수 있다.
  • 지도교수를 정할때 고려해야 하는 것은 (1) 인품 (2) 학문적 능력 (3) 펀딩능력이다. 그 중에 제일은 인품이다. 
  • 교수님들은 학생지도에 있어서 크게 조련형과 방목형으로 나뉜다. 전자는 지도학생의 공부 상황을 계속 체크하고 성과를 재촉하며, 상담이 잦고 간섭이 심하다. 연구실 단위의 세미나와 모임도 활발한 편이다. 후자의 경우는 지도학생을 독촉하지 않는다. 방목형과 비슷해보이는 것으로 방임형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방임형의 경우 지도학생에게 관심이 전혀 없고 뭐하는지도 모른다. 지도교수로 삼고자 하는 교수가 어떤 타입인지 확인하고 자신의 성향을 고려하여 결정해야 한다.
  • 어느 정도 마음이 섰다면, 해당 교수가 운영하는 세미나팀에 몇 개월 들어가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교수가 대학원생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유심히 보라. 원생들과 자주 만나며 학비를 충당할 수 있는 조교나 연구보조원 자리는 얼마나 있는지, 업무강도는 괜찮은지도 알아보는 게 좋다. 단, 세미나까지 참석하고 나서 다른 교수를 지도교수로 삼을 경우 배신자로 찍힐 수도 있으니 처신에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