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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계 대학원생의 나날

대학내 위계형 성폭력에 대한 대응 전략 2

지난 번에는 교수-대학원생간 성폭행 및 성추행 등 심각한 성폭력이 발생했을 경우의 대응방법에 대해 썼다.

2020/06/24 - [인문계 대학원생의 나날] - 대학내 위계형 성폭력에 대한 대응 전략 1

 

대학내 위계형 성폭력에 대한 대응 전략 1

오늘은 원래 원생의 학과생활에 대하여 포스팅을 하려 했으나.. 요 며칠새 또 교수-대학원생 간의 위계형 성폭력 사건이 연달아 터지는 걸 보고 착잡해져서 주제를 바꿨다. 시대가 바뀌고 또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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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성폭행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무척 심각한 일이다. 절대로 있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니다. 혹시 피해를 당하고 고민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덮고 넘어갈만한 사안이 결코 아니므로 적극적으로 신고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피해사실이 명백하고 증명할 수 있다면, 가해자는 마땅한 법적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고, 현행법상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경우는 당연해임 사유이다. 최근에는 성비위 교원에 대한 처벌이 점점 더 엄격해지고 있으며, 2019년부터는 성폭력범죄로 벌금 100만원만 나오면 당연해직 사유가 된다.

그런데, 사실 원생이 맞닿뜨리게 되는 상황은 이보다 애매한 경우가 많다. 성희롱이나 보다 수위가 낮은 성추행(ex. 머리나 어깨 등에 대한 상습적인 터치, 원치않는 귓속말, 노래방에서의 블루스 등)을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교수들은 생각보다 무척 많고, 이들에 대한 신고 혹은 고발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전 글에서도 썼듯이 원생이 교수를 신고/고발하는 경우 해당 교수를 해임/파면시키지 못하면 본인이 학계를 떠나야 한다. 최근 성비위에 대한 처벌이 엄격해졌다고는 해도, 교수를 해임시키는 것은 여전히 무척 어려운 일이다. 형사고발을 병행했는데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이라도 나면 그걸로 끝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차근차근 증거와 동료를 모아서 때를 기다려라. 

증거는 다다익선이다

교수가 어깨나 등허리를 한 번 터치한 것은 성추행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그러나 해당 행위가 술자리 혹은 연구실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상습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면? 그리고 교수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한 문제의식이 원생들에게 공유되어 있으며 복수의 피해자가 존재한다면? 대학원생들의 단톡방에 '교수님이 xx해서 술자리에 가기 싫다'는 대화가 남아있다면? 

비교적 피해수위가 낮은 행위라 해도, 피해자가 다수이고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면 가중처벌 요소가 된다. 문제될 행위가 계속 이어진다면 녹음과 촬영을 생활화하고, 카톡 대화 등의 증거를 모아둬라. 내가 직접 당한 것 뿐 아니라, 목격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SNS에 피해사실을 꾸준히 기록해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성폭력뿐 아니라 문제 교수의 다른 비위 행위들도 모두 수집해두라는 것이다. 경험상 성비위를 저지르는 교수는 그것만 하지 않는다. 대학원생에 대한 갑질, 인격모독, 표절 등의 비위행위를 동시에 저지르는 경우가 많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걸로는 교수의 징계 사유가 되기 어렵다. 그러나 연구비 유용, 횡령 등의 문제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학에서 교수가 해임/파면되는 주요 사유는 연구비 문제이다. 성폭력은 중징계 사유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연구비 문제가 걸리면 빼박 중징계이다. 성폭력 문제와 연구비 문제가 합쳐지면 더더욱 가중처벌 사유가 된다. 한국연구재단 등 연구비 지급 기관에 신고하면 그쪽에서 알아서 고소고발을 해주기도 한다.  연구비와 관련된 비위로 금고 이상의 형을 끌어낼 수 있다면 자동 해임 사유가 된다. 단, 이런 일들은 결국 실무적으로 원생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공범이 될 것을 염려하여 일을 담당한 원생 당사자들이 신고를 꺼리는 경우도 많다. 교수의 부당지시를 모두 기록해두고, 혹시라도 이를 통한 금전적 이익이 생긴다면 가능한 사용하지 않고 따로 모아두는 것도 방법이다.

팀으로 움직여라

교수를 고발하고 학계를 떠날거라면 혼자해도 좋다. 그래도 나쁜 교수놈 때문에 내 공부를 포기하기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함께 혁명을 일으킬 팀원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증거수집도 원활하고, 지도학생들 사이에 교수의 비위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피해자들을 지지할 수 있다. 하다못해 술자리에서 피해자들을 교수와 떨어뜨려 앉히기라도 할 수 있다. 

이전글에서도 썼지만, 교수 하나가 해고되면 그 밑에 소속된 지도학생들의 미래도 불투명해진다. 이 때문에 교수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참고 견디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원생들이 생각보다 무척 많고,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교수가 두려워 문제를 제기한 동료들을 오히려 적대적으로 대하는 경우도 많다. 믿기지 않을 수 있겠지만, 정말로 많다. 

혼자서 모든 걸 안고 총대를 매서 감당하려 한다면, 다른 누가 아닌 동료 대학원생에게 배척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교수 한 명이랑 싸우기도 버거운 와중에 저 내부의 불안과 불만을 혼자서 다 받아낼 수 없다. 그러므로 팀이 필요하다. 교수를 고발/신고하기 이전부터 증거수집을 해가며 적절한 시점을 함께 논의하고, 일을 진행하면서도 더 많은 지도학생들을 설득해 우리가 공동체라는 인식을 만들어가야 한다. 문제의 교수가 합당한 징계를 받아야만 우리가 더 나은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교수가 징계를 받은 이후에도 원만한 대학원 생활이 가능하다.

법적 공방은 신중하라

승소할 자신이 100%라면 괜찮다. 그러나 증거가 남지 않거나 법적 처벌 기준이 모호한 성희롱/성추행의 경우 형사재판으로 끌고 가는데 신중해야 한다. 사실 형사재판의 판결은 법적인 기준에 맞춘 결정이고, 그것과 교육자로서의 윤리 기준과 도덕적 책무는 별개로 취급되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재판이 시작되는 순간 학교의 징계도 법률적 판단에 연동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후 문제 교수가 교원소청이라는 제도를 통해 징계무효 결정을 받고 학교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심에서 승소하더라도 대체로 2심까지는 가기때문에 일단 시간부터 오래 걸린다. 시간만 많이 걸린다면 기다려 볼 만도 하지만, 증거불충분이라도 나오면 그 순간 교수는 복귀한다. 그런 결과가 우려된다면 법적 다툼을 병행하지 않고 학교 인권/성평등센터에 신고하여 교내 징계를 받아 내는데 집중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이다. 단, 최근 성범죄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에 따른 판결이 이루어지는 경향이기 때문에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 벌금 100만원 이상만 받아내면 된다. 변호사와 먼저 잘 상의해보길 권한다.

잘못된 일은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절대로, 피해자에게 원인을 돌리려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저항하지 않아서 피해를 당한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위계형 성폭력의 경우 많은 케이스에서 가해자는 여러 사람을 간봐가면서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경우가 많으며, 점점 수위를 올려가는 것도 주된 수법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평일 저녁에 전화를 건다 -> 주말에 전화를 건다 -> 평일 저녁 자리에 불러낸다 -> 주말에 불러낸다 -> 점점 늦은 시간에 불러낸다 -> 성추행을 시도한다.

차차 수위를 높여가면서 거부하지 않(못)는 대상을 타겟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지도교수가 사적인 식사자리나 주말에 불러내는 것을 쉽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상황이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거기서 멈춰야 한다. 순간을 참고 넘기면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다. 이렇게 간을 보며 가해수위를 높여가는 경우 초반에 거절 의사를 밝히면 강제로 뭘 하지는 않는다. 이거 별거 아니고 그냥 교수님이 호의를 보이시는 것 뿐인데 거절해도 될까? 라는 생각이 들 때 거절해야 한다. 오히려 그 단계를 넘어서서 누가봐도 이상한 상황이 오면, 그때 거부의사를 표시하는 것이 묵살될 가능성이 더 높다. 특히 최근에는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져서 멀쩡한 대다수의 교수는 특히 여성 원생에게 쉬는 날 사적으로 연락하거나 단 둘이 외부에서 약속을 잡으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 

물론, 상습 성폭력범들은 저렇게 자신을 "거부"하는 원생이 있을 경우 교묘하게 불이익을 준다거나 폭언을 한다거나 지도학생들 사이에서 왕따를 조장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거부의사를 밝히기 어려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슬픈 일이지만, 갑질 피해자가 되는 것이 갑질-성폭력 피해자가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사실 이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당장 나에게 피해가 없다고 해서 교수의 부당지시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거나 눈앞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외면한다면 어느 순간 나도 공범이 되어 있기 마련이고, 그 책임은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온다. 드러내놓고 거부하기는 힘들지라도, 적극적인 공모자는 되지 말도록 노력하자. 증거와 증언을 모아두는 것도 최소한의 실천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