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각성상태의 INTJ

일단 증상이 나타났을 때 병원에서 변형우울증(가면우울증) 진단을 받긴 했지만, 그 뒤로 내가 경성조울증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고 있다. 아직 진단받은 건 아니라서 의학적인 판단은 아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주기적으로 과각성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울증 진단을 받았을 때에도 과각성 상태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과각성의 징후들은 다음과 같다:

- 고양감 / 자신만만 : 내가 무척 뛰어난 인물이고 그만큼 중요한/중요해질 거라는 끝간데없는 자신감이 생기며 자아도취한다. 실제로 과각성 상태에서는 손대는 일마다 기대치를 가볍게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내기 때문에 고양감에 불이 붙는다. INTJ가 원래 거만하고 자아도취적인 경향이 있는 걸 생각하면 과각성 상태의 INTJ가 붕 떠있는 기분인게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 수면 감소: 게으른 시즌에는 하루에 10-12시간도 자면서 보내는데, 과각성 상태에 들어가면 하루 4-6시간 이상의 수면이 필요하지 않다. 잠이 잘 들지 않고, 잠들어도 금방 깬다. 몸이 언제나 긴장/흥분 상태인 느낌. 그 상태로 최소한의 수면 과 식사, 세면 등 생명/일상 유지에 필요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과업에 몰두한다. 

- 일벌이기+효율성 상승: 위에 두 가지 현상이 합쳐지면 얼마나 많은 일이 오든 나는 다 할 수 있어!! 하는 상태가 되서 온갖 오지랖을 부려대며 일을 벌린다. 그리고 다 한다. 공부와 행정, 그리고 각종 사회 활동들을 동시에 여러개 진행하면서 분단위 스케줄로 사람도 엄청 만나고 다닌다. 주변 사람들한테도 그만큼 해내라고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 상황이 오면 주변에서 (여러가지 의미로) 괴물보듯 본다. 기본적으로 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거기 맞는 계획을 짜서 몰두하기 때문에 대부분 성공한다.

- 불안: 고양감/자신만만함으로 충문한 상태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불안 증세가 나타난다. 내 경우에는 정서적인 불안을 느낀다기보다는 호흡불편감 및 심장두근거림 등의 증세로 나타난다. 몇 달을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보내다보니 이완을 위해 술을 찾다가 알콜중독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과각성상태의 나. 효율은 정말 좋다

 

몇 달을 저렇게 지내고나면 반대급부로 또 몇 달간 슬럼프가 온다. 돌이켜보면 십대 때부터 2-3달에서 6개월을 간격으로 주기적으로 있었던 일이기는 한데 그때는 내가 큰 문제라고 느낄 정도로 진폭이 크지 않았다. 20대는 과각성에 가까운 상태로 보냈지만 슬럼프 시기는 거의 없었으며, 만성적인 두통과 어깨통증 외에 일상에 방해된다고 느껴질만한 신체화증상도 없어서 그냥 내 성격이지 다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3년 여전 우울증 발병 이후 일년 넘게 과각성이 폭발했다가 반대급부처럼 1년 가까운 울증이 덮쳐와서 그때부터 내가 사실 조울증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많은 (경)조증 환자들이 그렇다고 하지만, 사실 과각성기에 내가 스스로 느끼는 효율과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퍼포먼스가 너무 좋다보니 그 상태를 바꾸고 싶지 않은 것도 문제다. 더구나 INTJ가 극호하는 게 바로 최고 효율... 잠도 안 자고 쉴 필요도 못 느끼고 계속 일하고 있는 내가 너무 좋은 것이다. 그 순간에 내 브레이크가 망가져 있다는 건 느끼긴 하지만 말이다. 

---

갑자기 조증/과각성 이야기를 왜 썼냐면,

각성기가 도래한 것 같기 때문이다. 이건 나도 처음인 느낌인데, 과각성까진 아니고 그냥 각성.

1월까진 처음으로 일상이 어려울 정도의 우울에 시달렸고, 4월부터 보통 수준의 게으름 정도로 천천히 회복하고 있었는데, 며칠전부터 각성 상태가 시작된 것 같다.

일단 수면이 줄어들었고(밤에 자야 한다는 생각이 안든다), 그냥 일만 하고 싶고(딱히 즐겁진 않다), 심장두근거림과 호흡불편감이 계속 되고, 뇌가 하루종일 이유없이 긴장 상태에 있다. 다만 고양감이나 자신만만함은 없어서 일을 벌이지는 않고 있다. 대개 그렇듯 가만히 있어도 일이 찾아오긴 하지만.

이제 작업 속도가 붙기 시작해서 좋긴 한데.. 근 몇 년 멘탈건강이 롤러코스터 타듯 오르내렸다보니 염려도 된다. 또 무슨 증상이 나오려고 이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