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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투병기

중독의 의미

최근들어, 내 감정을 내가 정말 잘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감정이 없다는 건 아니다. 요즘은 대체로 무감하게 지내지만, 순간순간 화나고 짜증나고 슬프고 공감가고 즐겁고 웃기고 어려운 감정들은 스쳐지나간다. 그런데 그뿐이다. 감정들은 나를 피상적으로 그때그때 지나칠뿐이다. 그 감정들을 내가 들여다본지는 정말 오래되었고, 들여다보려고 해도 어떻게 하는건지도 잘 모르겠다. 감정에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한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문득 최근 몇 달, 어쩌면 몇 년,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순간 그토록 좋아했던 영화도, 소설도 무엇도 지루하다. 십 년쯤 전에는, 대체로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느낀 적도 없다. 대체로 무감한 채로, 내 앞에 놓인 일들을 해치우며 지내왔다. 즐거운 순간들이 없진 않다. 사실 딱 한 종류의 일만이 즐겁다. 이런저런 사건들이 내 앞에 놓였을 때. 동원가능한 자원을 계산하고 상황을 읽어 대책을 세우고 스피디하게 움직일 때 아드레날린이 머릿속에서 팡팡 터지는 기분이 든다. 마치 중독된 듯이.그러고보면 근 몇 년간 내가 이완되었다고 느낄 때는 술에 살짝 취했을 뿐이다.

그렇다. 말초적 자극을 통해 감정을 마비시키는 행위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이건 확실히 중독이다. 나는 아무래도 일중독, 그 중에서도 투쟁 중독인 것 같다. 그러고보니 한참 우울증에 시달리고 또 투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몇 년 전, 나는 잠시라도 일에서 떠나있는 순간을 견디지 못했다. 조금의 짬이 생기면 온 몸과 정신이 밑으로 꺼져내리는 기분이 들다가, 핸드폰이 울리고 또 무언가 급박한 연락을 받으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정신이 살아나 누구보다 활발하게 움직였다. 바로 그때 나는 일코올중독초기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의 나는?
그때보단 낫지만, 감정이 올라올때마다 눌러버리고 일로, 공부로 도피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심장이 언제나 빠르게 뛰고 호흡불편감이 완전 사그라들지 않고 계속 남아있는 건, 어깨의 통점이 계속해서 쑤셔오는 건 그때문이겠지. 

나는 불안하다. 내 연구가 내 생각만큼 훌륭한 것이 되지 못할까 불안하고, 내 선배들이 하듯이 저술성과를 꾸준히 쌓아갈 수 있을지 불안하다. 무엇보다 내 나이치고는 드물게도, 여전히 내 인생은 특별하고 탄탄대로로 흘러갈거라는 나의 믿음이 깨질까 불안하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못하는 내 불안을 인정하게 될까봐 불안하다. 

나는 완벽한 인생을 꿈꾼다. 내 삶이 내가 그리는데로 이루어지리라고 비이성적으로 믿고 있고, 그때문에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일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게 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고, 아마 그 부분이 건드려졌기 때문에 우울증이 발병했을 것이다. 내가 부족하다는 인식은 나를 성장하게 하는 동인이지만, 그러나 내 경우에는 자아이상이 여전히 지나치게 유아적인 부분이 있는 것이다. 나는 완벽하지 못한 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내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삶의 부분들은 존재하지 않는 듯 행동해왔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을 눈으로 직시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우울해진다. '그' 부분들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는 있지만, 여전히 말로도 글로도 표현조차 할 수 없다. 

인생은 결코 내 맘같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완벽한 인생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더라도 내 것이 아니다. 이 당연한 말을, 진심으로 인정하는게 과연 나에게 가능한 일일지 잘 모르겠다.